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4세 (문단 편집) == 생애 == [[프린스 오브 웨일스|왕세자]] 시절부터 이미 품행이 나빴다. 머리가 좋고 재치 있는 성격이었지만 방탕한 성격이 문제였다. 18세부터 이미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낭비벽이 심해서 [[경마]] 등에 가명으로 나가 돈을 탕진하여 왕실 비용의 절반 수준인 빚을 졌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가]]([[루이 18세]])를 후원했다. 거기에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하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적극 개입하고 싶어 했다. 이러다보니 아버지가 자주 질책했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않았다. 1811년부터 아버지 조지 3세가 정신병 증세를 나타내어 더이상 국정을 이끌수 없게 되자 [[섭정]]을 맡다가 1820년에 즉위했다. 그래서 별명이 섭정 왕세자(The Prince Regent). [[제인 오스틴]] 소설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리젠시(섭정) 시대'가 조지 4세의 시대다. 애인 [[https://en.wikipedia.org/wiki/Maria_Fitzherbert|마리아 피츠허버트]]와 비밀리에 결혼했으나 그녀가 [[과부]]에 [[가톨릭]] 교도였기에 인정받지 못했고[* 이 때문에 조지 3세가 크게 화를 내며 아들의 빚을 갚아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왕세자궁에서도 쫓아내려 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협박으로 무효화했으며 의회의 중재로 본인이 진 빚 탕감을 조건으로 고종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캐롤라인]][* 굳이 자세히 설명하면 조지는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이쪽은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베버른).]과 결혼한다. 애초에 애정이 없던 결혼이고 조건부로 이루어진 혼인인 만큼 조지 4세와 캐롤라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삐걱거렸다. 조지 4세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사랑하던 애인과 강제로 헤어진 슬픔에 [[브랜디]]를 연신 마셔댔고 캐롤라인은 조지 4세가 뚱뚱하다고 조롱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지 4세는 대식가에다가 애주가인터라 심각한 비만이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체중이 111kg이나 되며 옷도 무려 50인치(130cm)를 만들 정도였다.] 조지 4세가 아내를 병적으로 싫어해서 [[섹스]]를 첫날밤 이후로는 안 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파탄난 결혼 생활 와중에 기적적으로 외동딸 [[샬럿 어거스타|샬럿]]이 태어났다. [[샬럿 어거스타|샬럿]]은 비난과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많은 [[영국인]]이 동정하고 사랑하는 공주였다. 그녀가 사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차기 왕위 계승자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의 이름을 샬럿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샬럿과 빅토리아는 사촌 관계.] [[샬럿 어거스타|샬럿]]이 태어난 후로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급기야 캐롤라인은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에서 쫓겨나 [[유럽]] 대륙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수많은 추문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인은 대중들에게서 동정을 받고 있었는데, 조지 4세의 사생활도 만만치 않게 막장이었던 데다 그가 아내를 딸 [[샬럿 어거스타|샬럿]]과 만나지도 못 하게 하는 것도 한 몫 했다. 심지어 1817년 [[샬럿 어거스타|샬럿]]이 출산 중 사망한 것도 알리지 않아 캐롤라인은 사위인 [[레오폴드 1세|레오폴트]][* 후에 [[벨기에]]의 왕이 된다.]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조지 4세가 정식으로 즉위하자 캐롤라인은 왕비로서 대관을 받기 위해 귀국했으나 근위병들의 저지로 [[대관식]]에 참석하지도 못 했다.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 상원은 간통을 이유로 캐롤라인에게서 왕비 자격을 박탈하는 법안을 발안했으나[* 이때 캐롤라인은 자기가 [[간통]]을 한 번 한 적이 있긴 한데 상대는 마리아 피츠허버트 부인의 남편, 즉, 조지 4세라는 농담을 던졌다.] 대중들의 반발에 밀려 결국 폐기, 캐롤라인은 영국 왕비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821년 사망했다. 조지 4세가 얼마나 아내를 증오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하가 기뻐하며 "폐하의 최대의 적이 죽었습니다!" 하고 알렸는데 조지 4세는 '''"오, 그럼 그 여자가 죽었단 말인가!"''' 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그 여자란 자신의 아내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을 말한다. 캐롤라인은 나폴레옹이 죽은 지 '''3달 뒤에 죽어서''' 결국 조지 4세의 소망대로 되긴 되었다. 유일한 적녀였던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가 먼저 사망한 탓에 1830년 그가 죽자 왕위는 동생인 [[윌리엄 4세|클래런스 공작 윌리엄]]이 물려받았다. 정실인 캐롤라인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으니 조지 4세의 남은 직계 후손들은 모두 사생아인데다 이마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IV#Marriage_and_mistresses|#]] 재위기간 내내 버킹엄 궁전 보다는 윈저 성을 좋아하여 윈저 성에 거주했다. 권력욕이 강한 터라 원저 성에서 사실상 은둔 생활을 했지만 정치에 자주 개입했고 국왕으로서의 업무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열심히 한 것은 아니며 정치도 잘 하지 않다 보니 이를 두고 수상들과 심하게 갈등하기도 했다.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기 시작했다.[* 통풍이 심해져 손과 팔을 쓸수가 없었고 백내장을 심하게 않아 수술까지 받았지만 한쪽눈의 시력을 상실한다. 그러다보니 당시 진정제로 쓰이던 아편과 라우다늄을 항상 달고 살았다.] 특히 병석에 않아눕는일이 많아졌고 업무를 더는 볼 수가 없어 왕위를 물려받을 동생이 대신하게 된다. 결국 임종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 조지 4세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유언장을 쓰게 했고 곁에 있던 대주교에게 그동안 방탕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는 말을 남기며 고해성사를 한다. 그리하여 1830년 6월 26일 오후 3시경에 조지 4세는 6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의사들이 부검했을때 사인이 위혈관 파열로 인한 상부 위장관 파열로 사망했고 그의 방광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장례식이 치러진다음 세인트 조지 성당에 묻히게 된다. 품행이 나쁜데다가 아내를 심하게 박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터라 생애 내내 평판이 나빴으며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은 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